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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젠다 설정과 의사결정 아키텍처: 질문을 선점하는 자가 결론을 지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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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젠다 설정과 의사결정 아키텍처: 질문을 선점하는 자가 결론을 지배한다 - 대표 일러스트

1. 완벽한 토론이 낳은 기형적인 결론

어느 제조 기업 X의 대회의실에서 늦은 밤까지 격론이 벌어진다. 최근 공장의 생산 효율이 급격히 떨어지고 납기 지연이 반복되자, 문제 해결을 위해 각 부서의 핵심 책임자들이 긴급 소집된 자리다.

회의 주관 부서는 참석자들에게 미리 정리된 안건 문서를 배포했다. 토론할 선택지는 명확했다. 첫째, 노후화된 조립 라인 로봇 설비를 전면 교체할 것인가. 둘째, 현장 작업자의 근무 체계를 2교대에서 3교대로 개편하여 가동 시간을 재배치할 것인가.

참석한 엔지니어와 재무 책임자들은 밤을 새워가며 데이터를 검토했다. 수백억 원에 달하는 설비 투자비의 감가상각 기간을 계산하고, 3교대 개편에 따른 야간 근로 수당과 인력 충원 비용을 정밀하게 대조했다. 수십 장의 비교 시뮬레이션 문서가 오갔고, 치열한 설전 끝에 설비 교체가 가장 타당한 대안으로 최종 의결되었다. 절차는 투명했고, 논쟁은 치열했으며, 도출된 결론은 주어진 데이터 안에서 지극히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1년 뒤 생산 효율은 단 1%도 개선되지 않았다. 수백억 원을 들여 들여온 신형 로봇 설비는 공장 한편에서 멈춰 서기 일쑤였다.

진짜 원인은 설비의 노후화도, 작업자의 피로도 아니었다. 본사 제품 개발 부서가 현장의 양산성을 고려하지 않고 매주 설계를 변경한 탓에 부품 조달이 마비되었던 것이 본질이었다. 또한 협력업체와의 발주 프로토콜이 전산화되지 않아 현장에 부품이 제때 도착하지 않는 병목 현상이 누적되어 있었다.

회의실에 모였던 최고 전문가들은 왜 이 명백한 원인을 단 한 번도 논의하지 않았을까? 그들이 무능하거나 게을러서가 아니다. 애초에 회의 시작 전 배포된 안건 목록에 설계 변경 승인 절차나 협력사 발주 프로토콜이라는 선택지가 올라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의사결정의 합리성을 평가할 때 언제나 주어진 선택지 중에서 무엇을 골랐는가에만 주의를 기울인다. 참석자들이 얼마나 논리적으로 반박했는지, 비용 대비 편익 분석이 얼마나 정밀했는지를 따진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작동하는 결정적인 질문이 있다.

그 선택지들은 애초에 누가, 어떤 기준으로 선별하여 회의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는가?

이 질문이 바로 아젠다(Agenda)의 출발점이다.

본질적 메커니즘: 아젠다는 단순한 회의 식순 목록이 아니라 인간의 한정된 주의력(Attention)과 자원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는 지적 여과기이자, 논의의 경계를 사전에 획정하는 비의사결정(Non-decision Making)의 시스템 장치다. 의사결정의 최종 품질은 주어진 선택지 사이에서 최선을 고르는 토론 능력이 아니라, 무엇을 해결해야 할 문제로 인정하고 무엇을 논의의 장 밖으로 배제했는가라는 의제 설정(Agenda-Setting) 아키텍처에 의해 사전에 규정된다.

2. 아젠다의 근본적 의미와 개념의 4대 위계

아젠다(Agenda)라는 단어는 라틴어 동사 아게레(agere, 행하다)에서 파생된 아겐둠(agendum)의 복수형이다. 본래의 어원적 의미는 행해져야 할 일들을 뜻했다.

오늘날 이 단어는 일상 대화, 비즈니스, 국가 정치, 학술 연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쓰인다. 그러나 맥락에 따라 가리키는 대상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에 종종 심각한 혼선을 빚는다.

1. 회의실의 아젠다: 한정된 시간 동안 참석자들이 논의하고 결론을 내려야 할 구체적 질문과 안건.

2. 기업 경영의 전략적 아젠다: 조직이 중장기적으로 자원과 인력을 집중 투입하기로 선언한 핵심 우선순위.

3. 정치와 사회의 공적 아젠다: 언론과 의회가 사회적 해결이 시급하다고 공인한 공공의 쟁점.

4. 연구 아젠다: 한 학문 분과가 향후 10년간 규명해야 할 미개척 핵심 연구 질문들의 집합.

5. 숨은 아젠다(Hidden Agenda): 겉으로는 객관적 검토를 표방하면서 특정한 결론을 유도하기 위해 개인이 은밀히 품고 있는 의도.

이처럼 다양한 층위가 존재하지만, 조직 안에서 가장 위험한 문제는 아젠다를 목표(Goal), 전략(Strategy), 실행 과제(Action Plan)와 혼동하는 일이다. 이 네 가지 개념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답해야 하는 질문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위계 구분

핵심 질문

본질적 역할

명확한 예시

흔히 범하는 오류

목표 (Goal)

무엇을 달성하려는가?

조직이 도달하고자 하는 최종 상태와 정량적 지향점

연간 고객 이탈률을 15%에서 5%로 낮춘다.

도달점만 제시할 뿐 어디를 손대야 할지 알려주지 못함

아젠다 (Agenda)

무엇을 중요하게 다루고 해결해야 하는가?

주의력과 자원을 집중할 핵심 문제와 판단 기준의 집합

가입 첫 7일 차 고객이 겪는 온보딩 병목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고객 관리처럼 명사 하나만 적어두어 논점을 증발시킴

전략 (Strategy)

어떤 경로와 선택으로 해결할 것인가?

자원의 비대칭적 배분을 통한 경쟁 우위와 해법의 선택

푸시 알림 증설을 버리고 튜토리얼 UI 단순화와 1:1 온보딩 채팅을 도입한다.

문제 정의 없이 남들이 쓰는 유행 도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함

실행 과제 (Action Plan)

누가, 무엇을, 언제까지 실행할 것인가?

구체적인 담당자와 기한이 명시된 작업 단위

프로덕트 매니저 A가 11월 10일까지 신규 온보딩 플로우 와이어프레임을 배포한다.

상위 아젠다와의 연결 고리를 잃고 단순 작업 체크리스트로 전락함

많은 리더가 회의 문서에 신규 사업 전략이나 매출 증대 같은 명사형 단어를 적어놓고 아젠다를 준비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명사형 단어는 아무런 문제도 정의하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막연한 관심 영역을 지목한 것에 불과하다.

매출 증대라는 추상적 주제가 "성장이 정체된 기존 B2B 고객의 객단가를 높이기 위해 요금제를 개편할 것인가, 신규 중소기업 고객군을 발굴할 것인가?"라는 구체적 질문으로 바뀔 때 비로소 논의가 시작될 수 있는 진정한 아젠다가 성립한다. 목표가 가야 할 목적지를 선언한다면, 아젠다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지금 당장 어떤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지를 규정하는 나침반이다.

거대한 시스템 여과망을 통해 수많은 잠재 문제가 배제되고 소수의 공인된 안건만이 테이블에 오르는 비의사결정의 역학 시각화
거대한 시스템 여과망을 통해 수많은 잠재 문제가 배제되고 소수의 공인된 안건만이 테이블에 오르는 비의사결정의 역학 시각화

3. 권력의 두 번째 얼굴: 비의사결정과 의제 설정의 역학

아젠다가 왜 그토록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지 이해하려면 정치학과 사회학이 밝혀낸 의제 설정 이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60년대 초반까지 전통적인 정치학은 권력을 "A가 B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B가 원치 않는 행동을 강제로 하게 만드는 능력"으로 정의했다. 즉, 공개된 회의실이나 투표장에서 찬성과 반대가 부딪칠 때 자신의 뜻대로 결론을 관철하는 사람을 권력자로 보았다.

그러나 1962년 피터 바크라크와 모턴 바라츠는 권력에 또 다른 얼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바로 비의사결정(Non-decision Making)이다.

진짜 강력한 권력은 상대방과의 치열한 토론에서 이기는 데 있지 않다. 상대방의 요구가 아예 공식적인 논의의 장으로 올라오지 못하도록 사전에 차단하는 데 있다. 기존 질서에 위협이 되거나 기득권의 이익에 반하는 쟁점을 다룰 가치가 없는 사소한 불평이나 시기상조인 사안으로 규정하여 회의실 문턱 밖으로 밀어내는 행위 자체가 가장 은밀하고 압도적인 권력 행사다.

이 비의사결정의 메커니즘 안에서는 겉보기에 패배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공개적인 갈등도 없었고, 부서 간의 고성방가도 없었으며, 표결조차 부쳐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의는 언제나 민주적이고 평화롭게 마무리된다. 그러나 불만을 가진 이들은 애초에 문제를 제기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조직의 회의실이 늘 조용하고 합의가 일사천리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조직이 화합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비의사결정의 장막이 논쟁적인 사안들을 시스템적으로 질식시키고 있다는 경고 신호일 수 있다.

이러한 의제 여과의 역학은 존 킹던이 발전시킨 다중흐름 모형(Multiple Streams Framework)을 통해 더 명확해진다. 사회나 조직에는 수많은 결함과 불만이 존재하지만, 그것들이 모두 공식 아젠다로 채택되는 것은 아니다.

1. 문제의 흐름(Problem Stream): 사람들의 주의를 끄는 지표의 급변이나 예상치 못한 사고.

2. 대안의 흐름(Policy Stream): 전문가 집단이 사전에 연구하고 다듬어 둔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해법.

3. 정치의 흐름(Political Stream): 대중의 정서 변화, 조직 내 리더십의 교체, 새로운 세력의 등장.

이 세 가지 흐름은 각자 독자적인 궤도를 그리며 흘러간다. 그러다 결정적인 계기(Focusing Event)를 만나 세 흐름이 한 지점에서 결합할 때, 비로소 정책의 창(Window of Opportunity)이 열린다. 반대로 아무리 심각한 문제라도 실행 가능한 대안이 사전에 준비되어 있지 않거나 정치적 동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젠다의 문턱을 결코 넘지 못한다. 결국 아젠다를 설정한다는 것은 현실의 수많은 문제 중에서 특정 사안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나머지를 의도적으로 탈락시키는 정교한 시스템 필터링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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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원문 보기
flowchart TD
    subgraph S1["1단계: 잠재적 현실 문제의 발생"]
        direction TB
        P1["현장 업무 프로세스의 마찰과 병목"]
        P2["조직 평가 제도의 불공정성"]
        P3["외부 시장 환경 및 기술 패러다임 변화"]
    end

    subgraph S2["2단계: 보이지 않는 아젠다 여과망"]
        direction TB
        F1{"기존 권력 구조 및 시스템 규범"}
        F2["기득권에 불리한 이슈의 사전 배제\n(비의사결정 기제)"]
        F3["정량 측정이 어려운 질적 문제 탈락\n(침묵의 필터링)"]
        F1 --> F2
        F1 --> F3
    end

    subgraph S3["3단계: 공인된 공식 아젠다의 확정"]
        direction TB
        A1["공식 안건 1: 단기 설비 교체 비용 검토"]
        A2["공식 안건 2: 교대 근무제 변경 일정 확정"]
    end

    subgraph S4["4단계: 제한된 선택지 내 합리적 의사결정"]
        direction TB
        D1["대안 A vs 대안 B 정밀 비교 토론"]
        D2["표면적으로 합리적인 최선책 도출\n(근본적 시스템 원인은 장외에 방치)"]
        D1 --> D2
    end

    S1 --> S2
    S2 -->|"여과망을 통과한 소수 이슈"| S3
    S3 --> S4

    classDef default fill:#18181b,stroke:#3f3f46,stroke-width:1px,color:#f4f4f5;
    classDef highlight fill:#27272a,stroke:#a1a1aa,stroke-width:1.5px,color:#fafafa;
    class S2,D2 highlight;

4. 실무 아젠다 설계의 5단계 아키텍처

이론적 배경이 분명해졌다면 이제 실무 현장으로 내려와야 한다. 일상의 회의실, 경영 전략 워크숍, 태스크포스(TF) 운영에서 아젠다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굴되고 설계되어야 하는가?

단순한 명사 나열을 넘어 살아있는 실행 엔진으로 작동하는 아젠다를 구축하려면 다음 5가지 단계적 아키텍처가 필수적이다.

1단계: 선별과 우선순위화 (Triage: 시끄러운 문제와 중요한 문제의 분리)

모든 문제를 동시에 다룰 수 있는 조직은 존재하지 않는다. 회의 시간과 주의력은 극도로 희소한 자원이다. 따라서 아젠다를 구성하는 첫 번째 작업은 무엇을 다룰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이번 논의에서 과감히 제외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다.

여기서 가장 경계해야 할 함정은 가장 시끄러운 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를 밀어내는 현상이다. 매일 터지는 사소한 고객 민원이나 당장 눈앞의 전산 오류는 사람들의 주의를 즉각 사로잡는다. 반면 장기적으로 회사의 생존을 결정지을 핵심 인재 유출이나 기술 부채 문제는 당장 소리를 내지 않는다. 우선순위를 판별할 때는 비가역성(지금 결정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가), 파급력(이 문제 하나로 연쇄 해결되는 하위 문제가 있는가), 판단 준비도(지금 데이터로 유의미한 결정이 가능한가)를 교차 검증해야 한다.

2단계: 문제 정의와 프레이밍 (명사에서 질문으로의 변환)

회의 연구의 권위자 스티븐 로겔버그는 회의가 헛돌고 공허한 토론으로 끝나는 가장 큰 원인으로 주제 중심의 명사형 안건을 지목한다.

회의 통보서에 "해외 시장 진출 계획"이라고만 적어두면, 참석자들은 각자 상이한 기대를 품고 회의실에 들어온다. 실무자는 예산 배분을 요구하려 하고, 임원은 진출 국가 선정을 따지려 하며, 마케터는 브랜딩 전략을 이야기하려 한다. 회의는 시작 10분 만에 각자의 이야기로 흩어진다.

좋은 아젠다는 반드시 답해야 할 구체적인 핵심 질문(Core Question)의 형태를 띤다. 여기에 디자인 방법론에서 검증된 HMW(How Might We) 질문법을 결합하면 섣부른 해결책 예단을 차단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동남아 지사 설립의 건" 대신 "어떻게 하면 현지 법인 설립 비용을 최소화하면서 초기 6개월간 현지 B2B 고객 10개 사를 확보할 수 있을까?"로 질문을 재구성할 때 참석자들의 시야는 본질적 가치로 정렬된다.

3단계: 기대 결과와 회의 성격의 엄격한 분리

많은 조직이 회의실에서 좌절하는 이유는 한 회의 안에서 정보 공유와 브레인스토밍, 그리고 최종 의사결정을 한꺼번에 해치우려 들기 때문이다. 성격이 다른 논의가 뒤섞이면 어떤 목표도 제대로 달성하지 못한다. 아젠다 항목마다 반드시 기대하는 결과물(Exit Criteria)의 성격을 명시해야 한다.

1. 탐색형 아젠다: 현상에 대한 공통 이해를 형성하고 잠재 원인 가설 목록을 뽑아내는 것이 목적이다. 여기서는 성급하게 최종 결론을 내리지 않는 것이 성공이다.

2. 비교형 아젠다: 사전에 조사된 복수의 대안에 대해 장단점과 리스크 매트릭스를 완성하는 것이 목적이다.

3. 결정형 아젠다: 합의된 기준에 따라 복수의 대안 중 하나를 최종 확정하고, 기각된 대안의 이유를 기록하며, 담당자를 지정하는 것이 목적이다.

4단계: 권한과 역할의 아키텍처 구축 (DACI와 RAPID)

아젠다가 아무리 훌륭해도 누가 결정권을 가졌고 누가 자문을 제공하는지 정리되어 있지 않으면 회의는 책임 없는 공방으로 끝난다. 모두가 동등하게 한 표씩 행사하려는 회의는 필연적으로 가장 무난하고 혁신성 없는 타협안을 낳는다.

베인앤드컴퍼니의 RAPID나 아틀라시안의 DACI 프레임워크를 차용하여 아젠다마다 역할을 사전에 배정해야 한다. 해당 아젠다를 주도하는 추진자(Driver), 최종 선택의 책임을 지는 단 한 명의 승인자(Approver), 전문 지식을 공급하는 기여자(Contributor), 결과를 통보받을 공유 대상(Informed)을 명시할 때 참석자들은 정치적 눈치싸움에서 벗어나 자신의 전문성에 집중할 수 있다.

5단계: 불확실성 속의 아젠다 공동 구성 (Co-creation Model)

여기서 한 가지 중대한 반론이 제기된다. 리더가 사전에 모든 아젠다를 완벽하게 작성해 와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과연 최선인가?

문제가 비교적 단순하고 선형적인 반복 업무에서는 사전 확정형 아젠다가 효율적이다. 그러나 조직의 명운이 걸린 복잡하고 불확실한 위기 상황에서는, 리더 혼자 밀실에서 짜온 정교한 아젠다 자체가 치명적인 인지 편향의 덫이 될 수 있다.

데이비드 콤로스와 데이비드 벤저민이 지적했듯, 복잡계의 문제를 다룰 때는 아젠다의 구성 과정 자체를 현장 참가자들과 함께 열어두는 지혜가 필요하다. 회의의 거시적 목적(Purpose)은 확고하게 세워두되,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하위 문제를 다룰 것인가에 대해서는 참석자들의 현장 증언과 데이터를 수집하여 현장에서 그룹핑하고 우선순위를 재조정하는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 아젠다는 한번 돌에 새기면 바꿀 수 없는 계명이 아니라, 현실의 새로운 사실이 드러날 때마다 기민하게 업데이트되는 살아있는 지도여야 한다.

닫힌 복도식 의사결정을 해체하고 질문 중심의 다차원적 경로를 비추는 개방형 아젠다 아키텍처 시각화
닫힌 복도식 의사결정을 해체하고 질문 중심의 다차원적 경로를 비추는 개방형 아젠다 아키텍처 시각화

5. 실무 아젠다의 설계: 실패한 양식과 성공한 양식의 비교

이론과 5단계 아키텍처를 실제 비즈니스 문서로 구현하면 어떤 차이가 발생하는가? 신규 플랫폼 서비스에서 가입자 이탈이 급증했을 때 두 팀장이 작성한 아젠다를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실패한 아젠다의 전형: 명사 나열과 모호한 기대

[회의 안건 안내] 일시: 2026년 11월 5일 14:00~15:00 참석자: 마케팅팀, 개발팀, 기획팀 전원 안건: 1. 지난달 가입자 현황 공유 2. 고객 이탈 문제 대책 논의 3. 서비스 기능 개선안 검토 4. 기타 건의 사항

이 회의는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참석자들은 각자 방어적인 태도로 회의실에 들어온다. 마케팅팀은 개발 결함을 탓하고, 개발팀은 마케팅 타깃팅 오류를 주장하며 1시간 내내 책임 공방을 벌이다 "각 팀이 대책을 세워 다음 주에 다시 모이자"는 허무한 말로 끝난다.

성공한 아젠다의 전형: 질문 중심, 역할 분담, 종료 조건 명시

[전략 아젠다 안내] 목적: 첫 30일 고객 이탈률 급증의 핵심 원인 가설을 검증하고, 다음 스프린트에서 실험할 개선안 1종을 확정한다. 승인자 (최종 결정): 제품 총괄 CPO / 추진자 (진행): 온보딩 TF 팀장 [아젠다 타임라인] 1. [상황 동기화 | 5분] (유형: 정보 공유 / 공유자: 데이터 분석가) - 질문: 최근 3개월간 이탈률 상승이 특정 유입 채널에 국한된 현상인가, 전체적인 현상인가? - 기대 결과: 문제의 범위가 전사적 현상인지 마케팅 채널 이슈인지 데이터로 확인. 2. [병목 규명 | 15분] (유형: 문제 탐색 / 기여자: UX 리서처, 고객 지원 리드) - 질문: 가입 후 첫 세션에서 사용자가 핵심 가치를 경험하지 못하고 이탈하는 지점은 어디인가? - 기대 결과: 사용자 여정 지도 상의 3대 이탈 마찰 구간 확정. 3. [가설 선정 및 대안 평가 | 25분] (유형: 대안 비교 / 기여자: 개발 리드, 마케팅 리드) - 질문: 가입 당일 필수 튜토리얼을 간소화하는 방안과 1:1 웰컴 가이드를 제공하는 방안 중 개발 공수 대비 효과가 높은 것은 무엇인가? - 기대 결과: 두 대안의 예상 전환율 및 개발 일정(공수) 비교 매트릭스 완성. 4. [최종 의결 및 역할 배정 | 15분] (유형: 최종 결정 / 승인자: CPO) - 질문: 이번 주에 즉시 프로토타입 개발에 착수할 단 하나의 개선안은 무엇이며 담당자는 누구인가? - 기대 결과: CPO의 최종 승인, 프로젝트 오너(PO) 지정, 1차 배포 일정 확정.

이 두 번째 회의에서는 누구도 딴청을 피우거나 책임 공방을 벌일 수 없다. 매 세션마다 답해야 할 질문이 명확하고, 각 세션이 끝날 때 도출해야 할 결과물이 정의되어 있으며, 최종 결정을 내릴 권한과 책임을 누가 가졌는지 사전에 공표되어 있기 때문이다.

6. 질문을 장악하는 자가 시스템을 설계한다

체스판 위에서 상대방의 말을 능숙하게 잡아내는 사람은 뛰어난 전술가다. 그러나 체스판 자체의 규격을 바꾸거나, 어떤 말이 게임에 참가할 수 있는지를 사전에 결정하는 사람은 룰메이커다.

비즈니스와 정치, 그리고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미 누군가에 의해 완벽하게 짜인 아젠다 안에서 뛰어난 지적 능력으로 정답을 찾아내는 사람은 훌륭한 플레이어에 머문다. 그러나 그 테이블 위에 어떤 질문을 올려놓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불필요한 사안을 과감히 쳐내며, 남들이 주목하지 않은 은폐된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사람은 시스템의 아키텍트다.

우리가 조직의 회의실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순간은 토론이 격렬할 때가 아니다. 오히려 아무런 잡음 없이 모두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일사천리로 합의에 도달하는 순간이다.

그 평온한 순간에 우리는 시스템을 향해 서늘한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 우리는 지금 진짜 중요한 질문에 답하고 있는가?

• 이 선택지 목록은 누구의 편의와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설계되었는가?

• 그리고 지금 이 회의실에서 가장 크게 소외되어 있는 침묵의 문제는 무엇인가?

더 나은 의사결정은 더 훌륭한 답을 찾아내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아무도 묻지 않았던 본질적인 질문을 발굴하여, 그것을 시스템의 아젠다 맨 첫머리에 당당히 올려놓는 지적 용기에서 시작된다.

이어지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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